마흔, 논어를 읽어야 할 시간

읽고서, 접어 놓았던 부분만,

택선종지 擇善從之: 좋은 것을 선택하고 따라간다
창의는 기존의 것을 다 하고나서야, 완전히 다른것에 대한 사고가 싹트기 시작하는 것이다. 운수에 의해 오는 것이아니라, 고통스런 숙련뒤에 찾아오는 손님인 것이다. 자기주도적인 시공간에서 창의가 생기는 것이다.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곳에서는 창의가 나타나기 어렵다. 자기주도적인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스스로 배울 것을 찾는다. 모든 곳이 자신을 일깨우는 교육현장이자 자신을 가다듬는 도량이다.

견현사제 見賢思齊 : 나은 자(나은 점)을 보고 배워 어깨를 나란히
삼인행 필유아사언과 같다.
모든면에서 뛰어난 자는 없다, 나보다 어린자라도 배울점은 배워야 한다.
부족한 것을 발견하면 교훈을 삼아 반성한다.
이러한 자세가 있어야, 삶에서 배우고 모든 것에서 배운다.
그러지 못한다면 체험하는 삶이, 나이가, 세월이 어떤 의미가 있겠는가?

절문근사 切問近思: 간절하게 묻고 가깝게 생각하라

각득기소 各得其所 /적재적소 : 모든 것이 제자리를 잡게
책임자가 되면 견제를 균형에 이르는 절차로 보지 않고 불필요한 간섭으로 본다.
그러한 책임자는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절대적 자유를 발휘하고자 하므로 자신의 마음을 잘 알아주는 이를 선호하게 된다. 이래서는 조정/중용의 길보다 독선과 극단만을 달리게 될 것이다.
책임자와 참모는 정반합을 이루며 화이부동을 이루어야 한다.
넬슨만델라 ” 언어나 피부색, 이전 정부에서 일했든 아무것도 걱정할 거 없네, 과거는 과거일 뿐 우리는 미래를 봐야하네”

무위이치 無爲而治 : 나서지 않아도 잘 굴러가게
사람이냐 시스템(제도)냐는, 덕이냐 법이냐와 같은 논란일 뿐이다. 이 모두다 필요한 것일 뿐이고 시기에 따르는 것일 뿐이다.
무위이치는 사람으로 시작해서 시스템으로 안정을 찾는 모습이 아닐까?
공자-“강제하지 않고서도 공동체의 안정을 일군 사람은 순임금이다. 어떻게 한것인가? 몸가짐을 공손하게 하고 자신의 자리를 지켰을 뿐인데.”

불령이행 不令而行 : 명령하지 않아도 돌아가게끔.
부모나 선생의 작은 행동과 이율배반적 모습들은 하나하나 각인되어 자식과 학생, 후배, 팀 구성원에게 전달된다. 듣는 것 보다 보는게 낫다는 것 처럼, 행동을 본 것이 진실이 된다.
공자 왈 “정치 지도자 자신이 올바르면(모범을 보이면) 이런저런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일이 척척 굴러간다. 하지만 자신이 올바르지 않으면 제아무리 명령을 내린다고 하더라도 인민들이 따라오지 않는다”
하라/마라…명령은 정작 말 뿐이며, 정작 그렇게 해야할 사람은 말하는 본인일지도 모른다.
(-한비자, 마키아벨리 – 물론 당연히 옳아 보이기도 해야한다. 그러면서도 높은 곳에 서서 권력이 있어야 한다.수고스럽게 모두 솔선한다고 해서 저절로 되는 것은 아니다.)

후생가외 後生可畏: 뒤에 오는 사람이 무섭다.
“뒤에 태어난 사람(후배)이 무서운 법이다. 그들의 앞날이 어찌 지금 사람만 못하다고 단정할 수 있겠는가? 또 나이가 사오십이 되었건만 그를 기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면 이런 사람은 두려워 할만 하지 않다.”
중국속담에 “장강의 뒷물결은 앞 물결을 밀어내고 한 시대의 새 사람이 옛 사람보다 낫다”
세대교체는 자연스러운 현상이고…역사는 정반합처럼 혁명과 선양의 반복이다.
ex) 불치하문 不恥下問 : 누구에게 묻건 무엇이 대수인가?

감동 :
공자의 리더십의 핵심을 감동에서 찾고 있다. 감동이란 사람이 느껴서 자신의 존재가 흔들리는 체험을 말한다.

고왕지래 告往知來 : 앞가락을 들려주고 뒷가락을 찾아라.
선생과 학생은 항상 속도가 안 맞게 마련이다. 아는 사람은 쉽고 모르는 사람은 어려워 느리기 마련이다.
공자는 학생에게 생각을 앞질러 말하지 않는다. 계속 질문하게끔 궁금점을 만들어주고 또 따라오게 만들어야 한다.
마치 부처와 가섭의 염화미소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주변에선 학생,후배,팀원에게 “그건 됐고!”라고 외치는 스승,선배,팀장이 보이지 않는가?

아즉불가 我則不暇 : 나는 다른곳을 기웃거릴 틈이 없네.
방인-얕은 공부를 밑천삼아 현실의 위정자나 실력자들을 대상으로 왈가왈부 하는 것이다.
자공이 방인하자 공자 왈 “자공은 참으로 똑똑한가 보구나, 나는 그럴 틈이 없는데”

정장면립 正牆面立 : 담장을 마주하고 서다.
요즘은 전문인들은 한세계를 책임지는 전문가임은 틀림없지만 전문 영역을 떠나서 과거의 문인만큼 문학적 소양과 논리적 사고, 그리고 예술적 감성분야에 나름의 일가견을 갖추고 있는가?
지금과 같은 전문화의 시대에 필요없다고 못하겠다. 모든 일과 사람의 관계는 말이고 문장이다. 직설정설로만 해결되는 것에는 감동이 없고 깊이가 없고 생각없는 즉각 반발로, 해결할 문제가 싸움으로만 변한다.

불분불계 : 몰라서 성내지 않으면 길을 터주지 않는다.
공자는 한번에 모든 것을 알려주지도, 알려줄수도 없다고 하였다.
“무지에 분노하지 않으면 길을 터주지 않고, 표현에 안달하지 않으면 퉁겨주지 않았다. 또 사물의 한 면을 제시해주어 그것으로 나머지 세 면을 추론하지 못하는 이에게는 되풀이해서 지도하지 않았다.”
답을 쉽게 얻기보다, 체험이 고민이 되어 궁하여 답을 찾는 과정이 필요하다.

윤집기중 : 치우치지 않게 중심을 잡다.
사회 지도자나 CEO, 많은 사람을 만날 수 밖에 없고, 많은 말을 들을 수 밖에 없다.
누구나 이러쿵 저러쿵 진리와 성과의 방향을 제시하며 비판과 제언으로 가득하다.
또 리더가 이야기를 들어줬다는 것으로, 자기편이라고 생각하고, 권력을 저울질 하려고만 하며, 여러 일들을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기만 한다.
이러하니 리더가 명확한 자기기준을 갖지 않으면 주의주장에 휩쓸리고, 사람 사이를 조정/통제하지 못하게 되고, 어느 누구의 지지도 받지 못한 채 갈등의 핵이된다.
중심을 끝까지 지키며 공정/투명/진정성을 갖추어야만 한다.

마부진야 馬不進也: 이놈의 말이 왜 이리 느려.
“맹지반은 자랑을 늘어 놓지 않았다. – 일부러 뒤에 서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말이 앞으로 달려가지 않았구려!”

걸혜걸린 乞醯乞隣 :이웃집에서 얻어 식초를 빌려주다.
인기에 영합한, 체면과 명분에 너무 민감하게 따르다 보면 나는 없어지고, 남이 보는 나만 남게 된다. 이것은 누구의 인생인가.

청언관행 聽言觀行: 하는 말을 듣고 하는 짓을 봐야.
말만 듣고 판단하지 않는다. 특히 사람과 인재를 등용함에서는 더욱 그래야할 것이다.
추천받고, 면접보고, 작은일을 주어 시험하는 과정이 필요한것이다.
말이 그대로 실행되지는 않는다. 이것이 지행격차와도 같은 것이다.
Knowing-doing gap.

비이부주比而不周 : 패거리에 갇혀 전체를 보지 못하다.
공자 왈 “자율적인 인간은 보편의 관점에 서므로, 당파성을 지니지 않는다.
반면 작은 사람들은 당파성을 지니지 보편의 관점에 서지 않는다.”
마치 화이부동 동이부화(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 )와 같다고 볼 수 있겠다.
이보다 더 나아가,
군자와 소인의 구별을 하며, 군자는 좋고 소인은 나쁘다는 고질적 관점이 있다.
누구라도 소인의 측면을 가진 요소가 있기 마련이다. 어쩌면 이것은 없앨 수 없는 개인의 단점이기도 하며, 사람을 모두 다르게 만들어 주는 장단점의 한 부분이기도 하다.
이러한 것을 무시하고 사람의 약점을 잡아 끝까지 소인 취급하고 공격하는 것은 도덕의 이름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것과 같다. 한번의 실수로 학교/나 회사에서 회복 불가능한 무능력자로 모는 것이다.
군자와 소인의 구별은 나를 선의 화신으로 만들고 타자를 악의 화신으로 만들어서 배제의 논리를 작동하는 데 그 목적이 있지 않다. 그것의 구별은 사람의 차이를 확인하고서 좀 더 나은 단계로 나아가는 변화를 일구어내는 데 목적이 있다.
소인은 친한 사람끼리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며 다른 사람을 끊임없이 배제한다.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보기전에 내 편인가 아닌가? 내 기준 잣대에 맞는가 아닌가? 라는 단순하며 명쾌한(?) 기준을 하나로 모든 것을 재단한다.
군자라고 함께 어울리는 사람이 없겠는가? 아니다. 군자는 어울리는 사람에 빠지지 않고 어떠한 사람이라도 동일하게 바라보는 자유로운 관점을 가지고 있다.

도덕제례道德齊禮 : 도덕으로 이끌고 예의로 가지런하게 하자.
허용과 금지의 각종 외적 규제(행정/외적동기)로 이끌어가고 처벌의 공포로 일사분란하게 만들려고 하면, 백성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처벌을 피하려고 할 분 비행 자체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자율적 규제(고상함)로 이끌어가고 전통 의식으로 가지런하게 한다면, 백성들은 과실을 부끄러워할 뿐만 아니라 서로서로 동화하게 된다.

관즉득중寬則得衆 : 너그러우면 사람이 모인다.
마냥 너그러우라는 것이 아니다. 가르침과 실수에 대해 그 수준에 맞추어 너그러워야 한다.
인재등용의 폭을 넓히고, 실수를 통해 배우게 하고, 왜 나만큼 모르는지에 대해 조바심 내지 않고, 꾸준히 강점을 찾아 트레이닝 시켜야 한다.
자신과 다르다고 다그치고, 억지로 시키게되면, 몸은 가까이 있어도 마음은 멀어지고 결국 화이부동/동이부화 일 뿐이다.
관용이란 사람을 자신의 영향권 안에 수용한다는 뜻이기도 하고, 또 공유하는 가치를 실현하는 다양한 길이 있다는 것을 허용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자신만이 옳고 다른 사람은 따르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면, 사람이 잠시 머물 수는 있지만 오래 함께 나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

혜이불비惠而不費 : 자원은 나누더라도 내다버리지 마라
자장 왈 “어떻게 하면 공무를 맡아 볼 수 있나요?”
공자 왈 “다섯가지 미덕과 네가지 악덕에 유의하게,
도움을 주지만 헤프지 않게 한다. 인민이 이롭게 여기는 대상을 보장해 그들로 하여금 이로움을 누리게 한다.
힘들게 시키지만 원망을 듣지 않는다.누구라도 힘을 들여야 할 일을 골라서 백성들을 힘들게 한다면 누가 원망을 하겠는가?
악덕 중, 백성들을 아무런 훈육(훈련)도 없이 죽인다면 학살이고, 어떠한 주의를 주지 않고 결과부터 따지려든다면 포악이라고 하지.

기타
* 최고 경영자, 지식인, 공무원, 국회의원, 대통령, 사회사업가 등 큰길에 뜻을 두고서 거지 옷이니, 싸구려 음식이니 늘어 놓는다면, 더불어 나아갈 길을 이야기할 만하지 않다. (나는 어떤 대접을 받아야 하겠다는 사람과는 더불어 나아갈 길을 이야기 할 수 없다.)
* 항상 예와 상호 존중이 결합되어야 한다. 유비-제갈량의 삼고초려는 군신의 일방적 요구가 아니라 상호 존중과 예의를 통해 유대를 맺었기 때문이다. 수평적/창의적/탈권위적의 막연함 만으로 서로 예의를 버리는 것은 윤활유 없는 엔진처럼 된다. 신분이 아닌 역할차이로 합리적 조직을 위한 권위를 찾고 예의와 존중으로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
* 자신의 개인적 경험/직관/기준에 의해 임의로 지휘를 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은 경우가 많다. 잘못된 확신을 카리스마로 오해하는 것은 잘 못된 것이다. 이래야만 조직을 통제할 수 있다라는 것도 잘못된 것이다. 리더면 무엇이든 맘대로 할 수 있다는 것도 착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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