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멸감…..굴욕과 존엄의 감정

책 제목부터 좀 자극적이었습니다. ‘모멸감!’
내용의 큰 맥락이나 줄거리를 제 생각의 흐름에 따라 정리해봤습니다.
(이후 내용에서 말을 좀 줄일게요-.-)
(c) 김찬호 저 | 문학과지성사
모멸감
 
저자는 세계적으로 조사 발표되는 여러 자료에서 한국인의 행복도나 자존감이 낮게 확인되는 이유를 추적(?)하면서, 한국인의 낮은 자존감 및 행복감을 극복하기 위한 도구로서 ‘타인에 대한 모멸’을 통해 ‘나는 대접받아야 하는 존재’를 만들어 나가면서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흔히 듣는 말들 ‘억울해 죽겠어’, ‘무시하지 마!’, ‘지가 뭔데…’, ‘회사가 우리를 우롱했다’… 이런 수 많은 모멸감의 짙은 흔적을 확인 할 수 있다고 한다. 요즘은 언론도 정부도 우리를 우롱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산업국가로서는 대국이다. 하지만 정치 사회제도와 경제력간의 불일치가 있다. 경제력에 어울리는 정치와 사회제도를 갖추고 두꺼운 중간층을 갖는 구조가 돼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 모두가 스트레스를 받는 사회다’ (강상중 교수)
 
너무 쉽게 모멸을 주고 받는다. 키가작다, 못생겼다, 뚱뚱하다, 화장이 이상하다, 비정규직이다, 영어 못한다고…
학력은 높아졌지만, 지성은 쇠퇴하고 지혜는 없어지고 있다. 수명은 길어졌지만 편안한 여생을 보내면서 죽을을 존엄하게 맞이할 것이라는 기대는 낮아졌다. 경쟁력은 높아졌지만 혹독한 경쟁과 그에 대한 대응처도 없다. 그저 사회적 부작용과 개인적 피로감을 견디기 힘들어지고만 있다.
그래서 많은 단어들이 들린다 ‘루저’, ‘찌질이’, ‘잉여인간’, ‘일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디스(disagree의 줄임말로서, 상대방을 적나라하게 깍아내리는 언사)’, ‘굴욕패션’ 등 모두 이에 대한 증상으로 볼 수 있다.
 
모멸감을 사람이 아니라, 사회와 시스템이 주기도 한다.
부유함이 똑똑함이 젊음이 약삭빠른자의 권력이… 나를 멸시한다. 누구도 대놓고 비웃지는 않지만 열패감에 젖어든다.
거대해지는 관료제도가, 조직의 시스템이 일방적으로 나를 기계적 작업자로 만들기만 한다. 어디에도 존중감을 주는 사람이 없다.
 
* 왜 이런 것인가?
 
 
수치심과 모욕감
 
수치심과 모욕감은 종이 한 장 차이이다. ‘유희’와 ‘희롱’이 다르듯, ‘노는 것’과 ‘놀리는 것’의 간격은 의외로 좁다.
만약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꼈고 고쳐나가려는 마음이 들었다면 ‘수치심’으로 시작하게 된다. 하지만 ‘수치심’이 자존심에 상처를 주기 시작한다면, 그 수치심을 일으키게, 망신을 당하게 하는 그 이유가 외부로 부터 들어온다면, 특히 그 대상에게 적개심과 억울함이 생기게 된다. 이것이 바로 ‘모멸감’을 받게 된 것이다.
수치심은 ‘느껴도 싸다’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모욕감을 ‘느껴도 싸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모멸감’을 주는 주체는 사람이 아니고 시스템일 수도 있으며, 개인 스스로의 낮은 자존감으로 인해서 모멸감을 느끼기도 한다.
자신이 응당 받아야 한다고 여기는 대접을 받지 못하면 과민하게 반응하는 경우가 거기에 해당한다. 또 얼마 안되는 비용을 지불하면서도 최고의 대우를 받아야겠다는, 마치 왕과 같은 행태를 보이는 모습도 같은 경우이다.
예를 들면
– 서비스 업체 직원이 고분고분 하지 않다고 격양하는 소비자.
– 어디서든 특별 대우를 받지 못하면 난색을 표현하는 부유/특권층.
– 하급자가 깍듯하게 떠받들지 않는다고 호통을 치는 고위공직자.
이런 인지 부조화와 자괴감으로 나온 행동으로 남에 대한 모욕적 공격을 쉽게 하고, 또 모멸감을 주변에 확대 재생산한다.
 
(어느 선생님의 이야기)
학교와 집에서 자녀 양육에서 특히 존중받는다는 느낌을 주고, 모욕감을 느끼지 않도록 도와야 한다.
한 아이가 교실에서 벌을 받던 중 오줌을 참지 못하고 그만 그자리에서 실수를 하고 말았다, 이때 교사가 아이에게 물을 끼얹으며 ‘이놈 벌 받으면서 졸면 어떻게 해!’ 호통을 쳤다고 한다. 학생이 느낄 수치와 모욕감을 덜어주기 위해서 한 배려인데 섬세하다고 볼 수도 있다.
 
누구에게나 마음속에는 수치스러운 부분을 지니고 있다. 그 취약함을 ‘역린’으로서 톡톡 건드리는 것이 아닌, 그 취약함을 인간으로서 인정하고 감싸주는 아량, 그래서 스스로 수치심을 모멸감으로 이어가지 않고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미덕. 
 
* 이것은 개인의 과제를 넘어 이제는 사회의 과제라고 보여진다.
 
 
자본주의와 모멸감
 
자본주의는 가치의 평가 척도로서 ‘돈’을 이용한다. 성과주의 사회, 산업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잘나고 못났음을 돈과 사회적 지위를 기준으로만 보게 된다. 아직 우리는 돈이 아닌 다른 것으로 평가할 만큼 성숙하지 못했다고도 한다.
그래서 우리 국가는 선진 OECD 산업국가이지만, 상대적으로 낮은 학업만족도, 행복감, 사회신뢰도 그리고 높은 자살률등이 그 증거라고도 한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꼭 우리나라 뿐만이 아니라 어디서든 나타나는 증상 중 하나가, 재산/돈 그리고 그에 의한 지위를 이용해서 얻고자 하는 자존감과 그로 부터 발생하는 상대적 모멸감이다.
미국의 gated community (마을/주택단지 주변에 성처럼 담을 쌓아 통제하는 끼리끼리 주거지), 한국의 영구임대 아파트와의 철저한 격리등으로도 그 단편을 살펴볼 수 있다.
어떤 단지는 영구임대 아파트의 아이들과 사귀지 못하도록 주의를 주고 철창을 세우며, 학교에서는 그 아이를 ‘영구’라고 부르며 놀리기도 한다.
 
이렇게 선을 그어 자신의 잘남을 확인하려는 것, 이것이 어떻게 보면 가장 ‘졸부’임을 입증해 보이는 것임을 아는 것인지 모르는 것인지…그저 주변을 낮추고 모욕을 주어서라도 자신을 높이려는 노력이 대단하다.
물론 주변과 비교해서 자신의 처지를 안다는 것을 납득을 하지만, 과연 자신의 자존감의 기준이 어디에 있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이제 ‘돈’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되었기 때문에 필요 이상으로 많은 돈을 ‘수집’하려고 하고, 자기자신을 ‘착취’하기도 한다.
물론 자기착취를 정당화 하기 위한 수많은 자기계발서들이 넘쳐나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는 수 많은 ‘스펙(Spec)’을 만들기 위해 살아가고 있다.
‘피로사회’와 이로 부터 영감을 받아 저술된 ‘왜 우리의 노동은 우울한가?’ 에서도 같은 점을 지적하는 듯 하다.
 
* ‘돈’으로 안될 것 같으면 ‘귀천’을 나누기 시작한다.
 
 
귀천에 대한 강박
 
저자는 한국사회의 역사적 맥락을 볼 때, 양반사회-일제식민지-근대화-산업화를 거치면서, 기존의 귀천에 대한 기준에 ‘돈’이 들어왔다고 보고 있다. 물론 ‘지위’에 대한 것은 계속 있겠지만 그 ‘지위’가 ‘돈’에 의해 바뀌어지는 것을 목격한 이후로 더욱 ‘돈’에 집중을 하게 된것으로 생각된다.
그 돈을 벌기 위한 첫번째 길은 ‘학업’에 집중하는 것이었고, 그래서 ‘출세’를 해야했고 그 ‘출세’에 들어간 비용을, 그 본전을 찾기 위해 정의와 도덕은 뭉개지기 쉬웠다. 그리고 그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서 끊임 없이 주변을 폄훼하고 비아냥거리고 모멸감을 안겨주어야만 했었나 보다.
 
누가 그랬더라, 학교에서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너희들 공부 안하면 저 청소부/식당 아줌마 처럼 된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한마디 만큼 우리들의 귀천에 대한 인식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 있을까? 
 
외형적으로 드러나는 몇가지 요소들을 기준으로 사람의 높낮이를 매기고 귀천을 따지는 것이 우리의 현재 속물적 문화다.
아무리 훌륭한 선생님이고 정치인이고 예술가이건, 작은 차를 몰고 음식점에 가면 유명수입차에 비해 주차할 때 부터 홀대를 받는다. 마치 우리 음식점은 유명한 음식점이니 너희들은 올 자격이 안된다고…그리고 우리 스스로가 그런 환경에 익숙하게도 스스로 부끄러워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 없이, 친구들과 연봉을 비교하고, 아파트 평수를 비교하고, 주소지를 살펴보고, 자동차를 비교, 자녀가 어떤 대학을 갔는지 비교하고 계속 계속 비참함과 모멸감에 사로잡혀 살고 있다. 
지금 사회는 이러한 ‘오만과 모멸의 구조’를 갖추고 있다. 그래서 이제 돈과 그에 따른 귀천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고 필수 요건이 되어간다.
 
우리는 이 ‘오만과 모멸의 구조’를 ‘상식’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아래와 같은 개인 또는 사회계층에 대한 모욕죄에 해당하는 일을 서슴없이 저지른다.
– (시각장애인이 잘 꾸민 방을 보며) ‘눈도 안 보이면서 뭣 하러 이런 데 돈을 쓰느냐?’
– (지적장애인이 화장품을 이용하여 꾸민는 것을 보며) ‘지도 여자라구…’
– (범죄자 수배 전단에) ‘키 172cm에 체격 건장, 노동자 품’
– ‘너 공부안하면 공장 노동자 된다’  (사실 생산공장이든 화이트칼라 단순 직장인이든 똑같은 기계부품과 같은 노동자다.)
 
* 이런 귀천인식 기준은 차별로 확대된다.
 
 
차별 – 열등한 존재로 정의하고 구분짓기
 
또 인종주의에 대한 콤플렉스, 열패감들도 함께 섞이기 시작한다.
 
– (외국인과 함께 서 있는 여성에게) ‘넌 조선X이냐? 새까만 외국놈이랑 사귀니까 좋냐?’
– ‘리틀싸이 너도 다문화라며?’
– ‘입양아들은 한국인이라고 다시 찾아오면서 왜 한국말도 못한데?’
– (영어 유치원 원어민 교사 모집 공고에서) ‘백인만 가능’
또 성적 정숙성으로 차별을 만들기도 한다.
다음은 여성가족부 출판한 자료집의 어느 매매춘 여성의 말이라고 한다.
 
“나는 여자들이 뭐라고 하는 것은 그래도 괜찮아. 뭐 모르니깐 그런다고 할 수도 있을 거 같아. 그런데 남자들이 그러는 것은 진짜 못 참겠더라고, 뭐 할 일이 없어서 이런 데서 일을 하냐고, 훈계하고, 큰소리 치고 그런 놈들 많아. 지들은 여기 왜 왔는데? 그러니까! 더 기가 막힌다니까/ 암튼 그런 놈들 많아~. 심한 경우는 ‘내가 씨발 얼마나 고귀한 영혼인데 너 같은 년들을 상대하고 있냐’며 막말 많이 해. 근데 진짜 이럴 때 기가 막히지. 지가 밖에서 얼마나 고귀한 영혼인지 내가 알게 뭐냐고! 그럼 오질 말던가.
 
이렇게 자기 분열적인 태도를 보이는 남성들은 대개 학력과 지위가 높다고 한다. 그 심경을 짐작할 수 있겠다. 내가 지금 너랑 이렇게 놀고 있지만, 난 너와 달라. 넌 늘 이곳에 있잖아. 난 어쩌다가 오거든. 넌 천하고 나는 귀한 몸이지. 지금 자신의 모습이 싫지만 욕정은 억누를 수 없고, 그래서 상대방을 비하하고 훈계하면서 자신이 낮아진다고 하는 생각이 들지 않도록 구별 짓는 것이다. 그러한 마음은 상대에 대한 경멸의 눈빛으로 나타나게 된다.
 
* 이렇게 하다가, 그 구분짓기와 차별을 상대가 납득하지 않으면 참견하고 훈계하기 시작한다.
 
 
참견과 훈계 – 침해 
 
우리의 정서로 보면 상대에 대한 관심일지, 정의 표현일지도 모르겠지만, 과거에 비해 상당히 개인주의적 관습이 자리잡아가고 있는 지금에서는, 모멸감을 불러일으키는 침해 행위로 볼 것들이 있다.
– 오늘 화장이 좀 떴네
– 몸매 관리 좀 해라
– 옷이 그게 뭐니?
처럼 너무 쉽게 외모, 나이와 결혼여부, 사생활에 대해 간섭하고 침해한다.
그러면서 ‘넌 왜 우리와 다르니’, ‘그정도 수준 낮게 하면 나랑 못 논다’와 같은 뉘앙스를 쉬지 않고 전달한다.
 
특히, 연장자가 상투적인 간섭으로 젊은이에게 모멸감을 주는 경우도 많다. 또 사회적 직업적 편견에 힘입어 쉽사리 반말을 예사로 하는 이들도 있다.
– 넌 왜 결혼안하냐? 남자친구는 있냐? 남자는 뭐하는 사람이냐? 애는 왜 안 낳냐? (명절날 어르신들 께서…)
– 그리고 병원이나 법조계쪽 근무하시는 분들의 훈계조와 거만함 & 반말. (담배 피우다가 온 환자를 개 취급하기…)
 
반말의사
 
또 있다.
 
영화 [악마를 보았다]에는 잔인하지만 인상적인 장면들이 여럿 있다. 그중 하나는 주인공인 살인마 장경철(최민식 연기)이 다친 몸을 치료받기 위해 찾아간 병원에서 벌어지는 장면이다. 처치를 끝낸 나이 많은 의사는 몸을 함부로 굴렸다고 장경철을 나무라며 ‘반말을 찍찍’ 한다.
 악마를 보았다
 
 
* 하지만 요즘 함부로 훈계조로 침해하다간 위 영화의 내용처럼 큰 코! 다치는 수가 있다. 그래서 다른 구분 짓기 방법을 동원한다.
 
 
 
동정 – 불쌍한 대상으로 못박아서 (그들을 낮추고 나를 높인다. 그렇게 모멸감을 보낸다.)
 
불쌍함과 슬픔에 연민을 보내는 것은 뭐라고 하지 않겠지만, 그 들이 어떤 상태인지 극복할 수 있는지, 좌절할 것인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이것에 대해서 맘대로 정의하고 못박아서 그들을 낮추어 버린다. 
 
계속 꼬리표를 붙여준다. 맘대로 짐작하고 판단한다.
– 걔는 성격이 저러니까 맨날 저모양이지.
– 그 여자 완전히 망가졌어, 아마 다시 예전처럼 살지 못할 거야.
– 쟤네들은 저기서 어떻게 사냐? 
교묘하게 포장된 또 다른 형태의 구분짓기이다. 나는 우월하고 너는 그렇지 않다. 
나는 너를 도와줄 수 있는 지위와 권력과 부를 가지고 있고, 너는 그런 것이 없어서 나로 부터 얻어서 살고 있다.
 
이 부분은 사람의 내적 심리가 진정 측은지심에서 돕고자 하는 것인지, 자신의 우월성을 입증하기 위한 기회이기 때문에 돕거나 불쌍해 하는 것인지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아마 자기 자신만이 알 것이다.
하지만, 돕는 행위 앞뒤의 말들을 살펴보면 대략 감은 잡을 수 있다. 아마 위의 예시처럼 ‘맘대로 짐작하고 판단하는 것’이 있다라면 그저 ‘동정’일 뿐일 것이다.
 
요즘은 수 많은 해외 난민/아프리카 돕기 단체들이 있고, 많은 후원자들의 호응을 얻고 있는데…
안젤리나 졸리의 난민 봉사중 아이에게 건넨 말을 한번 생각해볼만 하다고 보여져 이곳에 옮겨 보았다.
 
안젤리나졸리
(출처 : 알수 없음)
 
 
 
….이외에도 많은 모멸감에 대한 접근과 해석이 있으나, 요약본을 쓰자고 하는 것이 아니니 과감히 생략하고….
 
 
행복감은 우월감이 아니다.
 
– 시(詩) ‘노스패딩’ / 류연우 / 2011 서울북공업고등학교 학생의 국어시간 작품
 
겨울이 오면 모든 학생들이 노스(노스페이스) 패딩을 입는다.
왜 노스만 입을까, 다른 패딩들도 많은데
노스는 비싼데, 담배빵 당하면 터지는데
노스는 간지템, 비싼 노스안에 내 몸을 숨기고 
무엇이라도 된 듯하게 당당하게 거리를 걷는다
한겨울엔 노스만 입어도 무서울 게 없다
 
그렇다. 노스패딩을 여느 수입차 브랜드로 대체해도 똑 같지 않은가?
강남의 브랜드 아파트로, 최고급 스마트폰으로, 명품 핸드백으로, 무엇을 하는 회사인지 설명하지 않아도 그냥 알아주는 회사의 부장자리로 대체해도 똑같다.
남에게 모멸감을 주지 않아도 스스로 우월감이 행복이라고 믿는한, 당신은 무의식중에 수 많은 사람에게 모멸감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난 대접 좀 받아야 겠다.
깍듯하게 내가 모셔지지 않으면, 나의 허황된 자존감의 외적 기준에 대한 집착…그것이 들통날까봐 매우 두려워 한다. 
고위 공무원과 기업의 고위직들이 그렇게도 ‘응당 대접받을 권리’를 주장한다.
황제주차도 그러하고 포스코 라면도, 정부행사에서 자리배치에 대한 신경전도, 참사현장에서 계란 안풀은 라면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어쩌면 주변에서 모멸감에 익숙해진 우리들이 대접받을 권리를 알아서 챙겨주니 그저 아무 생각없이 받는 것도 있겠다. 하지만 생각없이 받는 것도 같은 것이다.)
황제주차와 계란안푼라면
* 모멸감에 대한 복수심은 평생간다. 그러니 관례라고, 나 이제 좀 한가닥 한다고 괜히 뒷짐지고 거드름 피우지 말고, 밥상차려 달라고 하지 말라. 당신의 모습을 보고 배운 측근과 자녀들이 그대로 따라한다.
주변에서는 당신의 날개가 꺽이기를 학수고대 하고 있을 것이다. 그 때 무참히 밟아주려고 말이다.
 
모멸감을 넘어서는 자존감을 찾아서…하지만,
 
‘삶이 특별해지는 순간은 자신이 더 이상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특별한 존재이고 싶다. 그래서 자존감의 기준이 위 노스패딩과 같이 밖에 있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가져야 하고 그것을 몸에 둘러야 하고, 내 명함에 새겨져야 한다. 그것을 통해서 자신이 특별한 존재라고 착각하면서 살아가는 이상은 모멸감의 고리는 계속 될것이다. 자존감을 남에게 의지하기에 끊임 없이 행복을 갈구하지만 얻을 수는 없다.
당신이 그토록 충성하는 ‘브랜드’는 결코 당신의 것일 수 없다. 그네들 회사의 자산일 분이고 당신은 그 브랜드에 그저 취해 있을 뿐… (브랜드를 집주소, 명품백, 회사내 직위로 바꿔도 같을 것이다.)
 
– 시(詩) ‘옷걸이’ / 김경선
…생략…
명품을 걸치는 건 최대의 꿈
상류사회로 가는 지름길은 겉치레에 있다.
…생략…
한 번도 제 인생을 살지 못한 그들은 타인의 얼굴로 산다.
양복 한벌이 서둘러 나가고,
평품 모피코트가 외출한 헐렁한 행거
제 얼굴인 양 거드름 피우고 우쭐대다가
당당했던 어깨가 허탈해지는 순간,
행거에 목을 매고 대롱대롱 목숨 연명하는 것들
본색이 드러났다.
 
…왠지 앞서 ‘대접 받겠다는 사람들’은 ‘옷걸이’ 같다.
* 특히 이런 사람들이 계속 주변에 모멸감의 씨앗을 뿌리고 키운다.
그들의 지위와 자리가 없어지고 난 다음에 그들이 살 수 있을까? 
 
 
 
모멸감에 대한 반격
 
그런 모멸감을 계속 받아주다 보면, 그들은 계속 ‘응당 그렇다’라고 착각하며, 모멸감을 사회적으로 확대하고 재생산한다.
이에 대해서는 ‘무시’하거나 ‘유머’로 승화하여 ‘반격?’을 하는 것이 좋은 방법인 것 같다.
 
외국에서 ‘바나나’는 인종차별의 상징/조롱에 쓰인다고 하는데,
동일한 ‘바나나로 모욕주기 행태’에 대해서 다른 두가지 대응이 있었다.
 
1) 2011년 ‘카를로스 향해 바나나 투척? ‘인종차별 논란’ 확산’
(약한 자존감의, 경험이 부족한?) 카를로스는 모멸감을 ‘아주 빠르게’ 받아들였고, 바로 흥분하였으며, 격분하여 참지 못하고 축구장을 뛰쳐나갔다. 결국 피해는 그와 그 팀에 돌아갔다.
카를로스바나나
 
 
2) 바로 몇일전인 2014년 4월 말.
관객이 코너킥하는 다니 알베스에게 인종차별의 의미로 바나나를 던졌다. 
그는 던져진 바나나를 줒어 까먹으면서 코너킥~ 골 들어가고 관객은 멘붕이 되었다고 한다.
알베스는 경기 후 “나는 누가 바나나를 던졌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에게 감사한다.
내게 에너지를 줘서 골로 연결되는 크로스를 두 번이나 할 수 있었다”며 상대팀 팬의 도발을 멋지게 받아쳤다.
출처 : http://www.youtube.com/watch?v=gWzxsO39pKw
 
이런 것을 사람들이 볼 때마다,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느낌을 다시 찾고, 모멸감을 남발하던 이들에 대한 통쾌함을 느끼게 하는 것 같다. 모멸감은 지금 우리 모두 매일 느끼는 감정이기에…
 
 
간디얼굴
 
그리고 최근 읽은 ‘간디’를 빌려 꾸며진 유머는 (실화인지 아닌지는 알길 없으나…) ‘무시’를 넘어 ‘반격’인 듯 하다.
 
간디가 영국에서 유학하던 시절, (당시 인도는 영국의 식민지 상태…)
자신에게 고개를 절대 숙이지 않는 이 젊은 학생을 아니꼽게 여기던 피터스라는 교수가 있었다.
 
1)
어느날 하루는 간디가 대학식당에서 점심을 먹고있는 피터스교수 옆으로 가서 앉게 되었는데,
피터스 교수는 거드름을 피우며 간디에게 말했다.
 
피터스 교수 : 간디군, 아직 잘 모르는 모양인데..돼지와 새가 함께 앉아서 식사를 하는 경우는 없는 거야.
간디: 아, 걱정 마세요 교수님. 그럼 다른 곳으로 날아갈게요..^^
 
2)
뜻을 이루지못한 피터스 교수는 복수심에 불타서 다음번 시험에서 간디에게 엿을 먹이고자 아주 까다로운 문제를 출제하였으나,
간디는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아버렸다. 피터스 교수는 분을 삭이며 간디에게 다음과 같은 추가 질문을 던졌다.
 
피터스 교수 : 간디군이 길을 걷고 있다가 두개의 자루를 발견했어. 한 자루에는 돈이 가득 들어있고, 다른 자루에는 지혜가 가득 들어있지. 둘 중 하나만 주울 수가 있다면, 자넨 어떤 쪽을 택하겠나?
간디: 그야 당연히 돈자루죠. 
피터스 교수: 쯧쯧.. 내가 자네 그 입장이었더라면 지혜를 택했을 걸세. (=자네는 지혜가 부족하네, 난 돈보다 지혜를 탐구한다네)
간디: 뭐, 각자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선택하는 것 아니겠어요? ^^
 
3)
멘붕 상태에 빠진 피터스 교수는 간디의 시험 답안지에 신경질적으로 [idiot (멍청이)] 라 적은후 그에게 돌려주었다.
그것을 받아든 간디가 교수에게 다가가 다음과 같이 물었다.
 
간디: 교수님, 제 시험지에 점수는 안적혀있고, 교수님 서명만 있는데요???
 
(출처 : http://humorzoa.tistory.com/2023)
 
 
* 그렇다, 모멸감을 마구 쏘아대는 사람들은 자존감이 낮은 이들이고, 그 모멸감에 반응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존재감을 그나마 찾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반응하지 말고, 무시해주고 유머로 승화해서 되갚아 주자. 많은 사람들이 우리들의 편이 되어 줄 것이다.
 
존재감을 찾는 두가지 방법 중에서…
 
‘자기의 장점으로써 남의 단점을 드러내지 말고, 자기의 졸렬함으로 인해 남의 능함을 시기하지 말라’ – 채근담
 
하나는 자기 보다 못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과의 비교에서 우월감(=행복이라고 착각)을 얻으며 과시하고 군림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우열의 관념에서 벗어나 하나의 지구상의 생명체로서 함께 마음을 나누고 배우며 경험을 공유하면서 존재감을 찾는 것이다.
전자는 외적 기준과 흔히 말하는 스탠다드를 쫒다가, 그 것이 끝날 때 자신에 대해서는 공허함만 남는다. 후자는 자신을 돌보는 힘이 자라나고 유대감을 통해 자존감이 더욱 단단해진다.
 
인도의 잠언 시집 ‘수바시타’에서는 ‘나 아닌 것들을 위해 마음을 나눌 줄 아는 사람은 아무리 험한 날이 닥쳐도 스스로 험해지지 않는다’ 라고 하였다.
 
가능성
모멸감을 마구 남발하고 사회적으로 재생산 시키는 것. 우리는 어떻게 해야하나.
마지막으로 철학자 ‘아비샤이 마갈릿’의 글을 발췌하고 마무리 해야겠다. 글이 너무 길었던 것 같다.
 
인간을 인간으로 보는 것은 습득된 것이 아니라 선천적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을 인간 이하로 보는 것은 습득되었을 확률이 높다. 나치의 교육 때문에 많은 사람이 유대인과 집시를 인간 이하로 보게 되었듯이 말이다. 
인간이 자기가 보는 것을 직접적으로 통제할 수 없다. 하지만 지금 보고 있는 것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의식적으로 변화시킴으로써 간접적으로 통제할 수 있다.
우리의 눈은 낙인을 무시하고 정확히 인간적 측면에서 사람들을 보도록 훈련될 수 있다. (중략) 어떤 사람을 모욕적으로 인간 이하의 측면에서 보게되는 경우, 우리는 우리 눈을 믿지 않도록 신경 써야할 뿐 아니라 상대를 인간 이하로 보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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